공간과 디자인을 만드는 더퍼스트펭귄 최재영 대표가 2012년부터 지금껏 진행한 프로젝트는 2백여 개에 이른다. 인터넷에서는 ‘핫 플레이스를 만드는 남자’라는 호평이 가득하다. 노출 콘크리트·코르텐강 같은 두꺼운 물성의 재료로 절제된 미학을 보여주는 카페 ‘진정성’부터 국순당 복합 문화 공간 ‘박봉담’ 프로젝트까지, 그의 터치에는 묵직한 감각이 인장처럼 배어 있다. 그런 그가 올해 쉰두 살 된 응암동 구옥으로 이사했다. 그는 무엇을 꿈꾸며 어디를 향해 가는 걸까?

삼베로 마감한 천장과 가구·카펫이 같은 톤으로 이어져 공간 분위기가 한층 풍요로워 보이는 거실. 최재영 대표가 앉은 의자는 아이들이 어릴 때부터 사용한 가리모쿠 제품이다.
최재영 대표가 보내준 주소를 찍고 와서 택시에서 내리자마자 이곳이 그의 집임을 직감했다. 구옥의 따스함과 현대적 아름다움이 한데 흐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전형적인 1970년대 주택”이라 표현한 이곳은 보통 집이지만 정성을 다해 지은 집 특유의 품격을 느낄 수 있었다. 1층 지붕 위로 넓은 다락방을 올려 언뜻 이층집처럼 보이는 외관, 색감을 달리해 현관 앞 바닥에 꽃무늬까지 만들어 넣은 테라초terrazzo 양식, 반듯반듯한 적색 벽돌로 마감한 벽면…. 이 정겨운 집을 한층 세련돼 보이게 하는 일등 공신은 ‘FRP 그레이팅’이다. 이 소재는 격자 모양으로 성형한 섬유 강화 플라스틱으로, 무게는 철판의 4분의 1밖에 안 되고 비나 화학 재료에 노출돼도 부식되거나 녹슬 염려가 없다. 평면의 그리드를 고스란히 입체로 떠올린 듯 반듯한 양감의 격자무늬 판을 그는 대문 재료로 사용했다. 색상은 채도 낮은 봄 같은 연두색. 주차장 위 울타리에도 이 연두색 재료를 사용해 집 전면부가 유독 환하고 감각적으로 와닿았다.

집을 지키는 감나무와 그 옆 정원, 볼수록 조각적인 계단과 벽면이 느긋하고 아름다운 패치워크처럼 보인다.
‘새로운 집에 왔다’는 기쁨을 안고 들어간 안쪽 풍경도 이색적이었다. 버드나무처럼 큰 감나무 두 그루가 안온한 그늘을 만들고, 마당은 대형 텐트를 쳐도 될 만큼 널찍했다. 곧이어 눈에 들어온 자전거와 축구공, 수박 무늬 워터볼. 감나무 가지 아래 스티로폼으로 만든 원통 모양 부표를 매달아놓은 것도 이색적이었다. 최재영 대표가 이곳으로 이사 온 때는 작년 12월. 겨우 두 계절이 지났을 뿐인데 이곳 생활이 완벽하게 자리 잡은 듯했다.


“평생 공동주택에서만 살았어요. 어릴 때는 5층짜리 아파트에 살았고, 결혼하고 자리 잡기 전에는 빌라에서 신혼 생활을 했지요. 미아리에 있던 할머니 댁에나 가야 단층집을 구경할 수 있었습니다. 2012년부터 회사를 차려 공간 프로젝트를 진행했는데, 늘 새것이나 새로운 것을 다루다 보니 삶에서는 반대쪽 이야기가 필요하다고 막연히 느낀 것 같습니다. 제가 선보이는 건축은 정제된 직선일 때가 많은데, 집까지 그러면 숨이 막힐 것 같았습니다. 점점 시간성을 지닌 것이 좋아지기도 하고요. 무엇보다 건축과 공간을 하는 사람인데, 경험의 폭이 협소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때부터 집을 찾아다녔고 1순위는 구옥이었습니다. 이 집은 저희 집이 아니에요. 전세로 들어와 있고 재개발로 곧 사라질 겁니다. 길면 10년, 짧게는 8년 정도 보고 있습니다. 이 집 입장에서는 어쩌면 저희가 마지막 ‘사람들’일 수 있겠네요. 그런 점이 애틋하기도, 애석하기도 합니다. 저와 아내는 물론 아이들에게도 이런 환경을 경험하게 해주고 싶었습니다. 큰애가 중학교 1학년, 막내가 초등학교 2학년이라 이렇게 풍성한 시간을 보낼 수 있는 마지막 구간에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재개발 이슈가 있다 보니 가격이 굉장히 합리적이었고, 지하실까지 있어 공간 구성도 재미있었지요. 무엇보다 너른 마당이 있고요. 이 집 이름은 ‘감남우집’입니다. 입구에서 감나무 두 그루 보셨지요? 하나는 대봉감나무고 또 하나는 단감나무인데, 서울에서 감이 익어가는 걸 보고 가을이면 그 감을 따 먹는다는 게 굉장히 특별한 낭만으로 와닿습니다. 마당에는 감나무가 둘, 저희 집에는 남자아이가 둘. 감과 남우를 합쳐 ‘감남우집’이라 이름 지은 이유입니다.”

주방을 중심으로 유기적으로 연결되는 공간들. 크지 않지만 벽면에 사각 구멍을 뚫고, 가벽으로 공간을 적절히 분할해 입체성을 부여했다. 식탁 옆 창문을 열면 역시 구옥인 이웃집 지붕이 보인다.
공간 디자이너가 어느 날 집을 선물처럼 갖게 되면 얼마나 설렐까? 최재영 대표는 이 기품 있고 정겨운 구옥을 맞아 신중하고 행복한 마음으로 구석구석 고쳐나갔다. 원칙은 집 역사를 훼손하지 않도록 최소한으로만 손대는 것. 열쇠를 꽂아 여는 철문과 옥색 창호는 그대로 두고, 부엌 가구와 TV장은 무늬가 아름다운 낙엽송으로 만들어 넣었다. 큰아이가 그린 그림, 아내가 만든 바느질 패치워크도 제자리를 찾아주었다. 가장 돋보이는 요소는 도배지 대신 천장에 붙인 삼베. 까슬까슬하고 연한 갈색 계통 식물성 섬유가 천장을 덮고 있으니 보기에도 이색적이고, 무엇보다 사진을 찍으면 풍취 여여한 찻집이나 갤러리 공간에 있는 듯 멋이 넘친다.

단독주택에 살면 들여놓는 가구도 조금씩 달라진다. 반듯하고 표준화된 기성 제품보다는 ‘단독자’로도 아름다운 아이들로! 반닫이 위 작품은 최재영 대표가 직접 만들었다.

부부 침실. 아파트에 살 때보다 물리적 크기는 줄었지만, 정서적 아늑함은 오히려 커졌다.
아파트 생활을 정리하고 구옥이나 한옥으로 이사한다고 하면 물리적 공간이 줄어드는 데서 오는 불편함을 걱정하는 이가 많다. 짐을 넣을 데도 부족하고 생활공간도 협소해 며칠 고민하다 이내 포기하기 일쑤다. 하지만 공간이 바뀌면 시간이 바뀌고 시간의 질도 달라진다. 물리적 크기는 줄어들지만, 정서적 크기는 몇 배로 커지는 것이다. “화장실도 두 개에서 한 개로 줄고, 이전에 어르신들이 쓰던 안방을 쪼개 아이들에게 주고, 작은방을 부부 침실로 쓰고 있지만, 결정을 주저할 만큼의 고민은 아니었어요. 우리에겐 마당이 있잖아요. 현관문을 열어놓으면 아늑하면서도 시원하고, 계절마다 놀랍도록 다른 그림을 보여주는 감나무가 새록새록 신선한 즐거움을 안겨줍니다. 감나무는 정말이지 신기해요. 봄에는 앙상한데 어느 순간 새순이 붙고 이내 놀랍도록 풍성해지지요. 엄청 작던 열매가 금세 주먹만큼 커지고요. 자연의 변화를 오감으로 느끼고, 실질적으로 경험한다는 게 엄청 큰 즐거움이에요. 저도, 집도 살아 있는 것 같은 느낌이랄까요? 물론 불편한 점도 있습니다. 침대 생활을 하던 아이들이 요를 펴고 지내는데, 이불을 개지 않으면 생활공간이 안 나와 일어나면 이부자리부터 정리하지요.(웃음) 바람직한 변화라고 생각합니다.”

낙엽송 합판으로 적절한 장식 효과를 준 주방. 냉장고에는 아이가 그린 그림을 추억처럼 붙였다.
중요한 건 물리적 크기가 아니라 시간의 질
감남우집은 물놀이와 캠핑을 좋아하는 가족에게 미더운 베이스캠프 역할도 한다. 지하실에 들어 있는 물건은 온통 야외 액티비티에 관한 것. 보트부터 캠핑 장비까지 아웃도어 라이프를 위한 용품과 집기가 한가득이다.

지하실은 최재영 대표의 또 다른 스튜디오이자 스토리지. 삼베에 옻칠도 하고 캠핑 장비도 점검하며 기분 좋게 비우는 시간을 보낸다.

고벽돌 사이로 보이는 격자무늬 설치물이 대문 재료로도 사용한 FRP 그레이팅. 구옥의 무게를 살짝 덜어내면서 세련된 질감과 분위기를 만든다.
“여름이면 충주호에서 수영하고, 강원도 고성에서 보트를 타고 무인도로 들어가 캠핑하고 옵니다. 무인도라지만 연안에서 1km 남짓 떨어진 곳이라 무척 안전하지요. 그렇게 물가로 가서 낚시도 하고 성게도 잡고 라면도 끓여 먹으며 시간을 보내다 옵니다. 내가 언제부터 이렇게 자연을 좋아했나 생각해보면 20대 때 호주에서 한 워킹 홀리데이 영향이 큰 것 같습니다. 그때 호수 수영을 처음 해봤거든요. 유럽에서 온 친구들은 1~2km쯤 우습게 왔다 갔다 하잖아요. 워낙 수영을 잘하는데, 그 친구들을 따라다니다 보니까 어느새 저도 호수 수영을 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 있더라고요. 자연에서 수영하는 게 얼마나 즐거운지도 알게 되었고요.

천장과 허공에 입체적 표정을 만드는 작은 아이디어들. 아프리카 조각과 조명은 최재영 대표의 관심사 중 하나다.

천장과 허공에 입체적 표정을 만드는 작은 아이디어들. 아프리카 조각과 조명은 최재영 대표의 관심사 중 하나다.

천장과 허공에 입체적 표정을 만드는 작은 아이디어들. 아프리카 조각과 조명은 최재영 대표의 관심사 중 하나다.
수영장에서 하는 수영이 운동의 영역이라면 호수나 바닷가에서 하는 수영은 명상의 영역인 것 같습니다. 오롯이 자연 속으로 들어가는 순간이 있거든요. 30대까지만 해도 이렇게 여름을 즐기지 못했습니다. 휴가는커녕 주말에도 계속 일을 붙잡고 있었으니까요. 늘 일하는 게 당연했지요. 그런데 40대에 접어들어 보니 이래서는 삶이 지속 가능하지 않겠더라고요. 그때부터 눈 딱 감고 오프 시즌을 보냅니다. 그저 한가롭게 즐기는 휴가는 아니에요. 경험의 밀도를 계속 올려나갑니다. 호주에서 배운 경험을 살려 스킨스쿠버를 아이들에게 가르치고, 매년 더 깊이 들어갑니다. 어느새 막내도 구명조끼를 벗는 단계가 됐네요. 이번 여름에는 제주도에 다이빙을 배우러 갑니다. 제주도에 ‘다이빙 처돌이’라는 아이디로 활동하는 분이 있는데, 제주 포구 다이빙 전도사라고 불리지요. 아름다운 포구도 가고 전문 다이버들이 모이는 곳에도 가면서 다이빙을 가르쳐주시는데, 다리를 완전히 편 채 멋있고 깨끗하게 점프하는 기술을 배우는 게 목표입니다.”

단독주택의 주요 애로 사항이 수납이지만, 머리를 굴려 방법을 찾는 재미가 있다.

역시 최소한으로 수리한 화장실.

당근에서 거래해 들여온 자개장. 마당 한편에 툭 놓았는데, 그 위 화분과 어우러져 독특한 색채를 자아낸다.
할아버지가 돼서도 즐겁게 일하려고 건축대학원을 다닐 만큼 본진에 충실하고, 틈틈이 즐기는 인생도 ‘공부’ 중인 그의 꿈은 바우하우스 같은 디자인 학교를 만드는 것. “바야흐로 ‘K’라는 파워가 저희에게도 많은 혜택을 주는 시대가 된 것 같아요. 그 파워 덕분에 해외 프로젝트도 여럿 진행하고 있습니다. 한국이라서, 한국인이라서 글로벌 무대로 진출하지 못하는 시대는 아닌 것 같아요. 세상이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한국 사람들이 일을 잘하잖아요. 감각도 좋고요. 구체적 계약 협의 같은 것은 AI가 도와주니 사람 대 사람으로 단단한 관계를 맺고, 일만 잘하면 문제 될 것이 전혀 없습니다. 제가 지금 경험하고 돌파하는 것을 중심으로 인문학적 교양은 물론, 일과 삶에 대한 태도까지 가르쳐주는 학교를 만들고 싶습니다.”

대문 한편, 두 아이가 타는 자전거. 골목과 이웃, 온전한 내 마당과 하늘이 생겼다는 게 곱씹을수록 좋다.
취재를 마치고 감남우집 을 빠져나오다 고개를 돌려 다시 한번 이 집을 내려다봤다. 쉰두 살이라지만 여전히 단정하고 품격 있는 집. 길어야 10년이면 사라질 이 집에 마지막 행복처럼 멋진 가족이 들어온 것 같았다.